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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모 사이트의 비평 관련 정책에 대한 단상

 

1.

이 글은 잡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심심해서 쓰는 거에요. 현실의 인명, 지명, 단체와 관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특별히 그들을 까내리려는 건 아닙니다. 약간의 의문을 표시하고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보고자 쓰는 글이지요.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놓긴 했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 진리가 아닙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모 사이트는 국내 최대의 장르소설 커뮤니티 중 하나입니다. 계속 모 사이트 운운하는 것도 불편하니 편의상 '문(門)'이라고 하죠.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문(門)에서는 장르소설 비평을 그닥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추천글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반발 때문에 지금은 약간 나아졌지만 한때는 비평글 금지까지 있었지요.

 

이 글은 그러한 비평 제한 정책에 대한 단상입니다. 

 

 

 

2.

제가 제일 의문스럽게 여기는 점은 '온라인 상에서의 추천/비추천이 매출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입니다. 지금 논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문제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문(門)에서의 추천/비추천이 대여점 매출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가 되겠죠.

 

저 역시 이렇게 자그마한 리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제 글이 무슨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대여점 매출에 미치는 영향은 개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 봅니다. 

 

왜냐. 대여점 고객들은 웹상에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탐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대여점 독자의 의사결정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날 그날 대여점에 들릅니다. 일단 신간 리스트를 보고, 신간 서가 쪽으로 갑니다. 제목을 주욱 훑어보고 소개글 잠깐 읽어보고 몇페이지 휘리릭 넘깁니다. 삘이 오면 빌리고 아니면 다시 꽂아넣습니다. 좀 망설여지면 점주 및 알바와 잡담을 하며 추천을 받습니다. 예전에 보던 작품 신간이 나올 때가 되면 챙겨달라고 부탁하고, 빌린 책을 들고 집으로 갑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어디에도 제 블로그가 낄 곳은 없지요. 문(門)이라고 해서 다를까요? 물론 규모 면에서 태양과 반딧불만큼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여점 이용자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공헌도를 본다면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문XX니 조XX니 모르거나 관심없는 독자들이 태반입니다.

 

이것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죠. 문(門)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작품도 대여점에서는 잘 나갑니다. 표절이 거의 확실시되는 작품도, 도덕적인 면이 크게 비난받는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자알 나갑니다. 그런 건 정보탐색에 적극적인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나 문제가 되지 대다수 대여점 이용자에게는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죠.

 

그렇기에 앞으로의 논지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의 대전제를 깔고자 합니다.

"온라인 상의 평가는 대여점 실제 매출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3.

문(門)의 정책을 논하기 전에, 일단 참가자들 면면부터 살펴봅시다. 일단 작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여점 장르소설계에 컨텐츠를 공급하죠. 출판사는 작가와 대여점을 중계하는 역할을 합니다. 독자는 대여점을 통해서 컨텐츠를 소비하죠.

 

문(門)은 예비작가들이 출판작가가 될 수 있도록 능력 발휘의 장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작가와 독자, 출판사를 중계하는 역할을 하며, 독자들이 글을 읽고 작가와 출판사,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죠. 그러한 과정에서 약간의 부수입을 얻어서 사이트를 유지합니다.

 

 

 

4.

문(門)이 비평을 부정적으로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ㄱ. 수준있는 비평가의 절대수 부족

ㄴ. 비평을 수용할 시장상황 미비

ㄷ. 비판이 아닌 비난이 압도적으로 많음

ㄹ. 독자 연령층이 고려되지 않은 비평은 현 대여점 이용자들에게 무의미

ㅁ. 비판이 많아도 잘팔리고, 추천이 많아도 안팔리는 현실

ㅅ. 과거의 경험 - 비평을 장려했더니 문(門)의 위상이 추락, 작가수 감소

ㅇ. 등등등등...

 

잘 살펴보죠. 핵심단어가 뭘까요? 제가 볼 때는 '문(門)의 위상'입니다.

 

 

 

5.

위의 2번에서 대전제를 깔았다시피, 온라인 상의 평가가 대여점 매출에 끼치는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고 봅니다. 수준있는 비평가가 명문을 쓰든, 초등학생이 대충 끄적인 글이든, 별 상관없다는 겁니다. 비난이든 맹목적인 추천이든 마찬가지란 거죠. 뭐라 써대든 실제로 빌려보는 대여점 고객은 안보는데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30대 독자가 겜판을 비판해봐야 10대 독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 문장이 어떻고 주제가 어떻고 아무리 까봐야 볼 사람은 보거든요. 근데 그게 어쨌다구요. 의미가 있든 없든, 그건 문(門)에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설사 의미가 있다 해도 영향력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고.

 

문(門)에서 비평이 많아도 잘 팔리고 추천이 많아도 안팔린다는 건 비평란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해야 할 근거가 됩니다. 그래야 문(門)을 이용하는 유저들만이라도 제대로 옥석을 구분해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문(門)에서 비평을 받았기에 잘 팔리는 것도 아니고, 추천을 받았기에 덜 팔리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문(門)에서의 평가가 현실적으로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것 뿐이죠.

 

다시 말해 저는 위에서 제시한 근거 대부분이 의미없는 이야기라 여겨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딱 하나 가슴에 와닿는 게 있다면 '문(門)의 위상 추락'입니다.

 

 

 

6.

대여점 독자라는 거대 집단에서 문(門) 이용자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결코 높지 않다는 건 확실하지요. 그 중에서 문(門)의 평가에 좌지우지되는 독자의 비율은 더 낮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는 어떨까요. 대여점 장르소설 작가의 대다수는 직, 간접적으로 문(門)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문(門)에 소설을 연재하고, 그곳에서 출판사와 컨택하고, 책을 내고, 작가 집단에 가입해서 도움을 받습니다. 문(門)과 대여점 이용자의 관계가 희미한 거미줄이라면, 문(門)과 작가의 관계는 두꺼운 동앗줄이라 할 수 있죠.

 

작가 입장에서 본다면, 확실히 온갖 비평이 난무하면 기분이 나쁠 겁니다. 비평이랍시고 글은 올라오는데 대부분은 비난 수준에 불과하고, 그래서 항의라도 할라치면 작가가 겸손하지 못하다는 둥 독자 의견을 수용할 줄 모른다는 둥 오히려 욕을 먹죠. 만약 초보작가라서 정말로 글을 못썼는데, 자기도 그게 괴롭지만 출판기회가 왔기에 그저 낸 것 뿐인데, 미세분말이 되도록 까이고 또 까이면 정말 문(門)에 머무르기 싫겠죠.

 

그런 일이 쌓이고 쌓여서 작가들은 떠나가고, 소설을 연재하고자 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든다면... 문(門)의 위상은 계속해서 추락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문(門)은 작가를 보듬어안을 필요가 있는 거죠. 

 

 

 

7.

그럼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여러분께 던져보겠습니다.

'독자들이 문(門)에 올리는 평가(비평이든 추천이든 단순감상이든...)가 도움이 될까?' 

이 질문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a. 문(門)을 이용하는 다른 독자에게 - 이건 도움이 됩니다.

b. 출판사에게 - 거의 도움이 안되겠죠. 아주 가끔 작품발굴에나 쓸모가 있을까.

c. 작가에게 - 솔직히 대부분의 경우 도움이 안됩니다. 특히 비난글이라면.

                     (물론 극소수 고수의 글은 예외입니다만)

d. 문(門)에게 - 작가에게 도움이 안되는데 문(門)에 도움이 될 리가 없죠.

                       없는 게 낫습니다.

 

정리해보자면 문(門)을 이용하는 독자들이나 비평을 원하는 거지, 작가나 문(門)이나 출판사에게는 도움이 안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겁니다.

 

'이봐이봐, 그건 아니지! 독자의 반응을 아는 것은 작가든 출판사든 도움이 되잖아?'라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심해야겠죠. 문(門)의 유저 = 대여점 이용자가 아닙니다. 문 유저는 대여점 고객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그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시장반응이 아니라는 겁니다.(오히려 반대로 가는 경우도 많음을 잊어선 안됩니다)

 

실질적인 대여점 고객들의 반응은 대여점 매출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매출에 가장 민감한 건 밥그릇이 걸려있는 점주들이죠. 출판사나 작가가 시장반응을 읽어내기 위해 신경쓰는건 대여점주들의 동향이지, 문(門)을 이용하는 일부 독자들의 취향이 아닙니다.

 

 

 

8.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문(門)에 올라오는 의견은 대여점에 기반한 장르소설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도 부정적인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매출에 끼치는 영향력이 적으니까요. 그러나 문(門) 자신의 위상에는 분명히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문(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들의 위상이죠. 당연한 겁니다.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영향력이 있어야 하던가 말던가 하죠. 작가들이 떠나고, 그러니 보러오는 독자들도 떠나고, 그렇게 이용자가 줄어들어 업계에 대한 발언권도 전무해지게 된다면 장르소설의 발전이고 자시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객전도가 되어버리는 거죠.

 

결국 국내 최대 장르소설 커뮤니티라는 현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평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문(門)의 운영자들이 내리더라도, 그러한 생각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겁니다. 뭔가를 하려고 해도 우선은 힘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착한 일도 우선 나 살고나서 하는 거고, 장르소설의 발전도 우선 문(門)이 살고 나서의 이야기죠. 이건 어떻게 보면 생존의 이야기입니다. 올바른 판단이라고 못해줄 것도 없죠.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9.

아쉬운 것은, 그렇게 나름대로 이 분야 최고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면서도 시장의 긍정적 변화를 위한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생존을 위해서 무분별한 비평/비난이 난무할 상황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 자체는 이해해 주지 못할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조치까지 취해서 힘을 손에 쥐었고, 그렇게 한참이 흘렀으니, 이제는 적극적으로 뭔가를 해볼 시기 아닌가요.

 

수준있는 비평가가 부족하다는데, 그러면 그러한 비평가를 발굴, 육성해서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운영자만이 글을 쓰고 있는 '논단'이라는 곳에 예전에는 몇몇 뛰어난 리뷰어를 선정해서 권한을 주곤 했죠. 수준있는 비평의 긍정적 효과를 인정한다면 그러한 제도를 확대실시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작가들 중 상당수는 문법, 맞춤법도 제대로 못써서 그런 경우가 많죠. 이런 작가들에게 적극적으로 학습을 장려하고, 독자 중 능력과 시간과 의욕이 있는 이들을 몇몇 발탁해서 약간의 댓가를 주고 교정원으로 활용한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이 그렇게 힘든 건 아니지 않을까요?

 

 

 

10.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위에 쓴 방법이 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서 뭔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을 쓰면서, 그 자리를 이용해서 긍정적인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힘을 쓰지 않으니, 자리 보전에만 급급한 정치가의 모습과 뭐가 다른지 의문입니다.

 

 

 

결론 :

위상 유지를 위한 노력은 이해합니다.

근데 그 위상으로 한게 뭔가요.

 

 

 

 

 

추신1.

저는 제 글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대여점 독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개미에 가깝겠지만,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는 독자들에게는 초파리 쯤의 영향력은 있을 겁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여점 고객에 비해 서점 고객의 관여도가 높기 때문에, 정보탐색에 열을 올리는 서점 고객은 타인의 의견을 심도있게 고려하는 경향이 강하니까요. 한마디로 라노베를 보는 독자분들 중에는 제 글을 읽고 구매할지 말지 결정한 분도 극소수는 있을 거라는 이야기죠.^^;

 

 

 

추신2.

작가들 중에는 독자들의 의견에 신중하게 귀기울이고, 그것을 자신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삼는 분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노력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절대 없음을 밝혀둡니다.  

 

 

 

추신3.

이 글은 문(門)의 '논단' 게시판 85번 글 '감상과 비평, 그 허실... 그리고 미래'라는 글을 읽고 문득 든 생각을 끄적인 겁니다. 

  

 

 

by 산산散散 | 2009/12/20 23:34 | 트랙백(1) | 덧글(1)

「이수영」

< 귀환병 이야기> 황금가지, 4권 완결
< 암흑제국의 패리어드 > 황금가지, 5권 완결
< 쿠베린 > 황금가지, 9권 완결
< 수호자 - bloody dancer - > 뉴티칭, 5권 완결
< 사나운 새벽 > 청어람, 7권 완결
<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 > 청어람, 2권 완결
< 루나 연대기 > 판타지미디어, 2008년 6월 1권 출간 이후 무소식
< 싸우는 사람 > 이타카, 2009년 11월 1권 출간
 

이타카에서 첫 작품으로 이수영님의 '싸우는 사람'이 나오더군요. 삘받아서 제 블로그에 이수영님 이름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몇개 쓴 감상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말이 필요없는 작가. 제게 이수영님은 그런 분이죠. 이수영님의 작품은 신의 선물과 같습니다. 그저 주시면 감사하지 다른 말이 필요가 없어요.

음, 솔직히 이야기하면 말이 필요없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기도 하고. 이수영님 글 리뷰의 대부분은 쓰다 삭제하거나 비공개로 해두고 저만 보거나 합니다. 제 부족한 표현능력으로는 그 매혹적인 세계를 가감없이 전달할 수가 없네요.

이수영님의 글을 한마디로 나타내자면, '야성'이라는 두글자가 가장 어울릴 듯 합니다. 가끔 그런 작가 있죠. 특정 모티브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각도 다른 깊이에서 창작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달에 미친 일본의 모 만화 작가라던가. 그게 이수영님에게는 야성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거칠고, 원초적이고, 위험하고, 정제되지 않은 욕망과 애증의 소용돌이. 그 속에 빨려 들어가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죠. 거대한 짐승과 함께 질주하는 수밖에요.

 

◇ 귀환병 이야기, 암흑제국의 패리어드

귀환병 이야기는 이수영님의 첫 출판작입니다. 오래 전 마계 정벌을 위해 떠났던 황자가 세월을 뛰어넘어 복귀하여 벌이는 활극입니다. 이건 정말 와 할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재밌을 수가. 4권 분량이 한 권인 것처럼 아쉽더라구요.

그 런데 오.. 후속작이 있었던 겁니다. 암흑제국의 패리어드죠. 안타깝게도 이수영님 작품 중에서는 가장 평가가 낮은 축에 속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봤습니다. 하지만 이수영님 특유의 색이 잘 드러나지 않은 글이 아닐까 싶네요.

 

◇ 쿠베린

아 쿠베린, 아... 정말 후유증이 컸던 작품입니다. 쿠베린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 절대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난폭한 돌풍같은 글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이수영님께서는 저의 마님으로 등극하게 되셨지요.

 

◇ 사나운 새벽

이 글은 이수영님께서 당시 매우 어리던 아드님 이름 - 윤석진 - 으로 출판하신 작품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작품 외적인 정보 탐색은 그다지 즐겨 하지 않는 편이라... 그 일로 인해서 에프월드에 연재되었던 낙월소검의 작가 에반님이 이수영님이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죠.(가능성은 낮다고 보지만, 그 정도로 괜찮은 작품이긴 했습니다..)

양판소 설정으로 양판소를 초월한 재미를 냈다는 평을 받는 명작입니다. 이수영님 작품 중 제일 자주 꺼내드는 글이기도 하구요. 읽으면서 가장 즐거운 작품이라. 저는 특히 중반 이후 알콩달콩(-_-) 씬이 좋았습니다. 몇번을 읽었는지 기억도 안나네요.

 

◇ 플라이 미 투 더 문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로맨스입니다. 2권 완결이지만 서너 권 분량 쯤 되고 내용의 밀도는 그 두배 정도. 대단히 밸런스가 좋은 작품이죠. 판타지면서 로맨스 소설이고, 이수영님의 야성미가 강하게 드러나면서도 그것을 절묘하게 애증으로 엮어내어 더할나위 없이 '진한' 향기를 풍기는 글이 되었습니다. 어휴, 아주 어질어질하죠. 역시 잘쓰는 분은 뭘 써도 잘 쓰는 건지, 진산님도 로맨스 참 잘쓰시더니 이수영님도 멋진 작품 내셨죠.


 

◇ 루나 연대기

게임 루나 연대기와 연계해서 나온 소설인 듯 하지만, 루나 연대기 홈피조차 들어가보지 않아도 읽는데 전혀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1권 이후 소식이 없다는 거죠. 멋진 글이지만 굳이 후속권을 내 주셨음 하고 바라진 않습니다.

제 생각에 특정 미디어와 연계해서 글을 쓰게 되면 불필요한 제약이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뛰놀아야 할 붓이 족쇄를 달게 되는 거죠. 원작의 세계관, 의뢰자 측의 요구. 그런게 없을 수가 없으니까요. 작가 이수영님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저로서는 좀 더 자신만의 세계에서 우러나는 글에 투자해주시는 편이 기쁩니다.

그렇다고 뒤가 궁금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요.ㅜㅜ

 

◇ 수호자 - bloody dancer -

이건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둔저님 제보로 그 존재를 알게 된 작품인데, 2002년에 출판된 데다 듣도보도 못한 출판사인지라 이거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하군요. 혹시 중고라도 판매되고 있는 곳을 아시던가 판매할 물건을 갖고 계신 분은 쪽지나 댓글로 사삭 연락을 넣어주세요. 전 책 상태 이런거 안봅니다. 글자만 판독 가능하면 ㅇㅋ.


 

◇ 싸우는 사람

(읽고 나면 추가하죠)

by 산산散散 | 2009/11/24 18:24 | 명예의 전당 | 트랙백 | 덧글(4)

『레드 세인트(Red Saint)』, 차가운 세상을 뜨겁게 노래하다

 


레드 세인트(Red Saint)는 라옌다님께서 장르소설 사이트 문피아에 연재하신 작품입니다. 2009년 1월 26일부터 10월 25일까지 만 아홉 달에 걸쳐 6장 구성으로 완결되었습니다. 보고자 하는 분은 문피아에 방문해서 작가분의 필명인 '라옌다' 내지는 작품명인 '레드 세인트'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 기쁘다 :::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기쁘고, 이런 글을 소개할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 추천해준 분들께 (원하지는 않겠지만) 감사의 키스 100번씩 마음 속에서나마 날리면서 본인도 추천글 하나를 더해볼까 한다.
 
 
 

::: 레드 세인트는... :::

 
두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데벨타네 공국을 배경으로, 한 귀족이 살해되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를 암살한 이는 조그마한 소녀였고, 비슷한 또래들로 구성된 암살단이 존재하며 그것이 상대 세력의 소행이란 게 밝혀지자 엄청난 스캔들로 번진다. 결국 암살단은 토벌되고, 그들을 키운 세력은 몰락하게 되는데.... 암살단 토벌의 와중에 십여 명이 생존하게 되고, 생존자의 하나인 9번이라 불리던 소녀는 옛 교관에게 납치(?)되어 외딴 섬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훈련을 받게 된다. 
 
이쯤에서 장르소설의 공식에 위의 재료를 넣고 드드득 돌려보면 다음과 같은 예측결과가 나온다. 9번은 교관에게 전설의 먼치킨 암살자로 태어나며, 암살단 토벌의 원수를 찾아서 처절한 복수를 하는 와중에 과거의 동료들과 만나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그 와중에 원수에게는 흑막이 있었음을 알게되고, 어쩌고 저쩌고 지지고볶다 보니 세계도 구하겠군. 뻔하다. 게다가 주인공이 여자라고? 신파극 좀 찍다가 놈팽이 하나랑 사랑타령도 하려나본데? 즐.
 
나도 레드 세인트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무협이든 판타지든 '부당하게 토벌당한 암살단의 생존자'류의 스토리는 대충 비슷하게 흘러가는 법 아닌가. 고정관념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현실이 그러한 것을 어쩌겠는가. 하지만 레드 세인트만큼은 그런 색안경을 잠시 벗어두어도 좋다. 이 작품은 다르다.
 
 
 
:::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
 
전부 다. 하지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가슴을 쫙 갈라서 심장을 꺼내어 보여주는 듯한 심리묘사다. 레드 세인트에서는 인간이 바뀌어가는 모습, 인간이 타락해가는 모습, 인간이 부숴져가는 모습, 망가진 채로 녹슬어 삐걱거리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너무나 가깝게 느껴져서 그 처참함에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리고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볼 수 있다. 누구도 묻지 않는 책임을 홀로 끝까지 지는 인간을 볼 수 있다.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을 볼 수 있다. 미쳐가면서도 소중한 것을 잊지 않는 인간을 볼 수 있다.
 
레드 세인트의 인간들은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럽고, 죄가 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부시다. 인간같지 않은 인간들이 나에게 더없이 인간적으로 다가온 것은, 분명 머나먼 곳에 있는 그들을 바로 내 곁으로 데려다준 작가의 붓이 부린 조화다.
 
그러한 조화가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에게만 닿아있지 않다는 것에서 한번 더 놀랄 수밖에 없다. 이럴수가. 캐릭터들이 살아서 파닥파닥거린다. 심지어 늙은 노기사의 부관이나 적의 심복2호의 아내까지 생생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것이 시점의 분산으로 이어지지 않고,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역동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엮어낸다.
 
 
 
::: 성인을 위한 판타지 :::
 
레드 세인트에는 '년', '씹, '개', '좆', '쌍' 등의 글자가 들어가는 대화의 비중이 매우 높다. 한마디로 욕쟁이들이 많다. 암살단에서 서로 갈구며 몇년 지낸 인간들이다보니 주둥이가 무척 더럽다. 또 미쳐버린 캐릭이 정상인 비중보다 높다보니 잔혹하고 강도높은 폭력 및 성행위 묘사가 다수 등장한다.
 
이건 분명히 개인의 호오가 개입될 수 있는 부분이다. 나 역시 '미친 여신의 정원사들'같은 작품을 읽을 때 여주인공의 걸레같은 입담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홍정훈님의 '더 로그' 연재시 간살사건을 읽고는 모니터를 반쯤 부수기도 했다.(그땐 젊었다) 하지만 레드 세인트의 그것은 다르게 느껴진다. 이건 꼭 필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육두문자가 들어갔기에 더 웃기고, 더 흥이 나고, 감정적으로 더 동화할 수 있다면 있는 편이 당연히 낫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싫어할 뿐. 잔인한 폭력과 농도짙은 성행위도 그러하다. 이게 소위 남성독자들 꼴리게 만들려고 넣은 건지, 이야기에 꼭 필요하기에 넣은 건지, 그 목적적합성과 개연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내 생각에 시타디아 암살단의 아해들은 전부 미쳤고, 미치는 게 당연하고, 그러한 비틀림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 욕설, 폭력성, 변태적 성행위다.
 
다만 이러한 요소들은 나이 어린 독자들보다는 아무래도 좀 더 세상맛을 본 성인들이 받아들이기 쉬울 듯 하다. 잔혹함 뒤에 숨은 광기를 꿰뚫어보고, 욕설에 담긴 은근한 정과 토해내기 힘든 감정을 이해하고, 비정상적인 섹스에서 비틀리고 꼬인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으려면 세월의 도움이 조금은 필요할 듯 하다.
 
 
 
:::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 :::
 
레드세인트는 멍하게 그냥 읽을 수가 없는 소설이다. 끊임없이 화두를 던져주고,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류네스를 굴리고 상황을 비틀면서, 작가의 답을 멍때리고 기다릴 수 없게 만든다. 함께 걸어가며 고민하라고, 이 미쳐버린 불쌍한 녀석들과 같이 머리 좀 굴려보라고, 넌 이럴 때 어떻게 할 거냐고 끈질기게 요구한다.
 
레드세인트에는 삶이 있다. 다양한 세상사를 통해서 우리네 삶이 어떤 건지를 보여준다. 그래? 우리 삶이 어떤데? 간단하다.
 
좆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건 안된다. 착하게 살아도 반드시 보답이 있는 건 아니다. 난 모든 걸 희생해가며 애를 써도 안되는데 어떤 놈은 한끼 식사처럼 해치운다. 누구는 벌레처럼 태어나 벌레처럼 살다 벌레처럼 죽는데, 누구는 나면서부터 모든 걸 갖고 있고 세상의 즐거움 다 누리다 행복하게 간다. 개같은 세상, 좆같은 세상이다.
 
지랄같은 세상 싫으니 뒈질란다 하면 거기서 끝나는 문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류네스와 독자가 함께하는 '살아가는 방법 탐구생활', 그것이 내가 읽은 레드 세인트라는 글이다.
 
 
 
::: 기교 :::
 
레드 세인트가 노래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범상치 않는 글솜씨가 요구된다. 작가가 직접 A는 A야!! 하고 소리쳐봐야 독자 귓등에서 미끄러질 뿐이다. 읽어가는 와중에 분노하고, 가슴을 치고, 눈물 흘리고, 두주먹 불끈 쥐는 와중에 자연스레 깨닫도록 해야 하는 거다.
 
레드 세인트는 마치 깊은 늪과 같다. 처음 몇장을 읽을 때는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흔한 암살단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스승님'이 등장해서 포스를 흩뿌려주자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그와 9번의 생활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정신적인 변성을 잘 그려낼까 싶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이후부터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교묘하게 기만하고, 짜릿한 전투씬으로 가슴에 불을 확 댕기고, 둘러가나 싶더니 쭉 치고 들어오며 정신없이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리고는 얼이 빠져 헤롱대는 내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다. 따라오라고, 보여줄 것이 있다고. 그렇게 홀려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고, 완결편을 볼 때까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도 한발 담그고 있는 기분이다.
 
 
 
::: 마지막으로... :::
 
오랜만에, 정말 정말 오랜만에, 뜨거운 가슴으로 달릴 수 있었다. 온몸에 흐르는 전율이라는 걸 라이브로 느껴보았다. 류네스가 소리칠 때 나도 함께 외쳤고, 그녀가 울 때 나도 눈물 흘렸다. 관용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이런 멋진 글을 만날 때마다
나는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오래 살아서 이런 글을 계속 만나 심장을 데울 수 있다면,
내게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by 산산散散 | 2009/10/28 20:01 | 판타지 | 트랙백 | 덧글(8)

인간실격님의 『Novel Engine』 ,from 배틀N

 

 

  

 

『Novel Engine』은 J노블 홈페이지 및 카페에서 인간실격님이 연재하고 계신, 배틀N 이벤트의 참가작 중 하나입니다. 어제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되었기에 리뷰 한번 올려봅니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쓸 것이므로 네타가 싫다면 파란 박스 안의 '감상' 부분만 보시길 바랍니다. 거기엔 네타 없는 간략한 소개만 해두도록 하죠. 그 아래 핑크 박스는 까발림 신경 쓰지 않고 적겠습니다.

【연재장소】

J노블 공식카페 : http://cafe.naver.com/jnovel21

J노블 홈페이지 : http://jnovel.co.kr/ (투표도 여기서 한다는군요)

 

  

 

『Novel Engine』은 어떤 대사건을 기점으로 역사가 바뀌어버린 현대를 배경으로 한 라이트노벨입니다. 이야기가 동력원이 되고 마법이 일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린 세계죠. 세계관 구성의 깊이가 돋보이고, 애매하지만 뭔가 있을법한 떡밥이 대량으로 투척되어 어떤 식으로 다룰지 설레이게 만드는 매력이 있네요.
 
이야기는 한 소년이 습격을 당해 기억을 잃는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깨어나 보니 지식은 멀쩡한데 '자신에 대한 기억'만 쏙 사라져 있고, 비인간적으로 아리따운 소녀들이 다가와서 걱정해 줍니다. 뭐가 뭔지 당황하면서도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 몇가지 사건이 일어나며 차츰차츰 이야기는 윤곽을 드러내... 려고 하는 시점에서 연재는 종료되었습니다.
 
전문적인 마법용어가 난무하고 온갖 설정이 춤을 추면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왠지 멋있어!!'로 요약할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합니다. 이런 거. 하지만 출판된다면 권말부록으로 용어해설 정도는 넣어주시는 게 좋을 듯 하네요. 기술명만 보고도 어떤 건지 감을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라서 거리감을 느끼는 분도 있을 테니.
 
주인공 이지현과 (현재로서는) 히로인격인 세 자매의 캐릭터는 뚜렷하게 잘 서있다고 봅니다. 이런저런 만담은 꽤 재밌는 편이고, 주인공의 넉살도 라노베답다면 답네요. 하지만 현재까지는 무난한 수준 이상은 아닙니다. 아직 연재되지 않은 후반부에서 얼마나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을지가 문제겠네요.
 
전체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참으로 라이트노벨 다운 글입니다. 읽다보면 자꾸 뒤가 궁금해지고, 마지막까지 읽고 싶어지는 흡인력도 있구요. 다 못보게 되면 무척 아쉬울 것 같습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 이야기는 아래쪽에서 하도록 하죠.
 

 

  

 

 

여기서부터는 노블 엔진을 읽으며 느껴진 감상을 가감없이 적어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부족한 제 관점에서 나온 의견이니 그냥 참고로만 보시길 바랍니다.
 
 
1. 쉼표
 
제가 보기에 가장 크고 가장 눈에 띄는 단점은 쉼표 남발입니다. 연재글 리플에 일본식 문체 느낌이 난다는 의견이 있던데, 쉼표의 남용도 그렇게 느껴지게 만든 큰 원인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일본어는 띄어쓰기 잘 안합니다. 걔들은 중간중간 쉼표로 문장구조를 표시하죠. 우리말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띄어쓰기라는 게 있고, 그런 게 없더라도 일본어보다는 필요성이 덜하죠. 저같은 경우 원서를 많이 보다보니 문체에도 그게 드러나곤 합니다. 점점 갈수록 쉼표 쓰는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지금도 엄청나게 찍고 싶은 걸 열심히 참고 있습니다.
 
인간실격님이 저와 같은 경우인지 아니면 그저 낭독하는 호흡에 따라 쉼표를 찍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블 엔진의 쉼표 중 60%는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호흡을 끊어먹고 일본문장 느낌이 나게 만드는 주적이죠. 개인적으로는 '노블 엔진의 모든 쉼표를 삭제한 후, 다시 읽어보면서 꼭 필요한 부분에만 쉼표를 넣은 다음 전후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하고 제안을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2. 시제
 
문장의 시제가 현재와 과거를 마구 넘나듭니다. 의도적으로 현재 시제를 써야하는 경우가 분명 있고, 실제로 그런 부분도 보입니다. 하지만 전혀 필요없는 장면에서도 현재 과거 현재 과거 현재 과거를 넘나드는 건 굉장히 불안정한 느낌을 줍니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이니 만큼 특별한 목적이 없는 경우에는 일관된 시제 구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시점
 
노블 엔진은 3인칭 소설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3인칭을 가장한 1인칭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지현'을 '나'로 바꿔도 별 위화감 없이 읽을 수 있을 정도죠. 그만큼 화자와 타 등장인물 간의 거리에 비해 화자와 지현 간의 거리가 가깝다는 겁니다.
 
라이트노벨에서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건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흔하다고 해서 바람직한 건 아니죠. 2번에서 언급했던 시제 문제도 화자가 주인공 '내부'에서 서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생한 거라고 봅니다.
 
작가분 문체 자체가 이런 유형이고, 이미 작품 다 써놨는데 이제와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만... 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제점을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혹은 인식하고 있음에도 어떠한 목적 하에 3인칭을 가장한 1인칭 소설을 써내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별로 긍정적인 효과는 없다고 말하고 싶네요.
 
 
 
4. 캐릭터
 
캐릭터를 구체화 하는 방식이 너무 단순해서 아쉽습니다. 특히 세 자매가 그렇네요. 선명한 색채와 흔한 코드(성인의 외형-아이의 내면이라는 갭을 이용 / 그 반대 / 고딕로리타 코스튬 / 금은요동 / etc)의 사용은, 독자가 손쉽게 이미지를 움켜쥘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식상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부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흑요와 적요의 첫 등장씬에서는 살짝 한숨을 쉬었으니까요.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하며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는 그녀들을 보니 더욱 아쉽네요. 라이트노벨이란 장르의 특성상 전혀 문제될 것 없는 무난한 조형입니다만, '흔한 캐릭터'라는 평을 벗어나긴 힘들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유명진'이라는 인물이 딱 와닿지 않더군요. 특히 대화 스타일이 묘사와 배치되는 느낌이 심했습니다. 38세의 베테랑 검사관이 아니라 26세의 복학생 대학 동아리 선배 같은 이미지가 자꾸 떠오르는군요. 사적인 대화에서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지만 오래 산 이의 연륜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은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자매들을 부를 때 쓰는 '인형아'는 좀 심했습니다. 아무리 호칭에 대한 지침이 내려왔다지만... 다른 호칭을 강력하게 권해봅니다. 아무리 봐도 마흔 다 된 남자가 쓸 호칭은 아닙니다. -_-)
 
 
 
5. 프롤로그
 
5.a.
소설의 프롤로그는 미국소로 치자면 한마리당 3% 나온다는 프라임급 고기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고, 흥미를 유발시켜서 계속 읽게 만들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갖고 있죠. 이를 위해 많은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 왜곡하기도 합니다. 프롤로그부터 지루하게 설명설명설명이 난무하면 누가 보겠어요.
 
하지만 노블 엔진의 프롤로그는 생략해도 너무 생략한 듯 느껴집니다. 프롤로그만 읽어보면 '한 소년이 세 소녀와 작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저격을 받았는데, 소녀들을 지키기 위해서 뛰어들어 막았지만 총알이 심장에 박힌 후 뇌로 이동해서 파열하여 사망했다'가 됩니다.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 프롤로그를 보면 딴지를 걸 곳이 상당합니다. 소년이 무슨 슈퍼맨이냐, 어떻게 사수를 본 것도 아니고 이미 발사된 총알을 본 이후에 움직였는데 그걸 막을 수가 있느냐, 이미 심장이 파열되었는데 총알이 연어라도 되는 양 파닥파닥 거슬러 올라가 뇌를 파괴하다니 이거 뭐냐, 이 작가 밀리터리하고는 담을 쌓았구만 등등.
 
물론 조금 더 읽어보면 이 소설은 시작부터 한 소년이 희생당하는 다크하고 시리어스한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전혀' 암시가 없다는 점에서 흥미보다는 의아함이 앞설 수 있다는 거죠.
 
 
5.b
효과적인 구성 상 프롤로그는 단편적인, 극히 한정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내부적으로는 확고한 논리 위에 서 있어야 하죠. 그래야만 소설 전체를 지탱하는 틀이 견고해지는 겁니다. 그런 견지에서 프롤로그의 습격 사건을 다시 한번 고찰해보죠.
 
최초에 습격자의 의도로 떠오른 것은 '인형 자매들의 암살, 혹은 그런 척 하며 맛보기' 정도였습니다. 이 경우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뒷내용과 연계해서 볼 때 가능성이 높진 않은 것 같군요. 나중에는 '사실은 이지현을 노리고 발사된 게 아닌가'하는 추측이 제시됩니다. 만약 이쪽이 진상이라면 이후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 무척 많습니다.
 
분명 마탄은 인형을 향해 조준된 걸로 나오고, 지현은 그걸 막아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직접 지현을 노리지 않았는가. 지현이 인형들을 커버해줄 거라는 추측이 서 있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고의로 인형을 노림으로써 표적을 혼동하게 만든거라면 그러한 계책의 목적은 뭔가. 애초에 지현은 왜 막아선 것인가. 세 자매는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들이고, 자기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등등등.
 
물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으니 그저 설레발일 뿐입니다만, 저를 납득시킬 만한 답이 준비되어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5.c
지현의 사고 중 '심장에는 감각이 없을 텐데' 이 부분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내장기관 중에는 통각수용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심장은 통각이 가장 많이 분포해 있는 기관 중 하나입니다. 적절하게 수정하는게 미래의 까임을 방지하는 길일 듯 하네요. 참고자료 하나 첨부하죠. [여기]
 
 
 
6. 사소한 것 몇가지
 
6.a. 흑요의 키
매우매우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둡니다. (강조까지 하는데 이걸로 딴지거시면 안되요.^^; ) 저에게 있어서 여성의 키가 155~165라면 애인 삼기 좋은 정도입니다. 170이면 훤칠하네, 175면 모델 체형이구나 합니다. 180 이상은 솔직히 말해 거인입니다. 여자 골리앗입니다. 귀여움은 커녕 압박감을 느낍니다.
 
작가분의 개념도에서 여성 키 180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섹시다이너마이트가 되기 위한 필수요소 중 하나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에게 있어 180cm의 거구로 애교를 날려대는 흑요는... 뭐랄까... 자기가 치와와인 줄 아는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느낌이군요.
 
제 머리 속의 흑요는 170cm로 키가 수정되어 있습니다. 안그러면 몰입이 안되더군요. 더군다나 주인공의 키는 160도 안된다는 설정 하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구도를 그려보면...
 
 
6.b
'하지만 직접 시험해 본 바로는 큰 이상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FAKE1, 지현)
이상점을 이상으로 바꿔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나을듯.
 
운동이나 놀 시간은 별로 없어-. (FAKE2, 흑요)
운동하거나 놀 시간은 별로 없어-. 가 맞겠죠.

맞춤법 검사까지 할 생각은 없고, 그냥 생각나길래 적어봅니다.


 

6.c
본문에서 세연이 언급했듯 '정체성 혼란같은 주제는 낡아빠졌기 때문'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청기사의 탑승자와 지현이 처음 만났을때의 대화 흐름이 굉장히 어색하더군요. 난데없이 자기와 똑같은 쌍둥이가 튀어나왔는데 적요와 흑요 운운 하고 있다는 게.
 
'왜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어째서 자신과 똑같이 생겼는지에 대한 의문이 뒤로 미뤄진 사실을 깨닫는다'(Double Dear4챕터에서 발췌)라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과연 기억을 읽은 지현이 그 상황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근원적인 의문을 뒤로하고 적요와 흑요 걱정이나 하고 있을 만큼 그 둘에 대한 애착이 깊을지 의문이 듭니다. 물론 작가분 설정 나름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후 이어지고 있는 '시온'이라는 이름을 언급해 두고, 특정 화제를 회피하기 위한 무리한 흐름인 것처럼 느껴지네요.
 
 
6.d
더블디어3편에서 흑요가 '이야기'를 매개로 마법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매개가 되는 이야기가 지현이 쓴 글이었기 때문에 그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죠. 하지만 매우 중요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눈물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죠. 남자는 일생 세번만 운다느니 하는 마초틱한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니니까요. 저도 조금 그런 편이라 주인공(男)이 눈물을 보이는 장면에서 감동을 받으려면 충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해당 씬은 '지현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부분'임과 동시에 '이야기를 매개로 마법을 실제로 발현하는 최초의 장면'이기도 하기 때문에, 적절한 묘사를 통해서 독자에게 발동 메커니즘을 전달해야 하는 역할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기질의 마법기제 설명에 뒤이어 남정네가 눈물 질질 흘려봐야 감동은 오지 않는 법이죠.
 
개인적으로는 흑요의 마법 발동을 '지현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어땠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흑요가 하나의 문장을 너무나도 소중한 양 수천번, 수만번 되뇌이는 모습. 분명 육성이 아님에도 선명하게, 가슴을 찌르듯 파고드는 흑요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절절하게 느끼는 지현. 그 의미가 마법으로 발현되는 기적과도 같은 장면을 보면서, 이야기를 자아내는 자신과 이야기에서 의미를 발견해준 흑요가 만들어낸 하모니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다' 같은 식으로요.
 
 
6.e
더블디어4에서 나온 흑요의 무장 이름이 '참철검'입니다. 강철조차 베는 검이란 뜻이니 특별히 문제는 없지만 워낙 유명한 무기(이면서 기술명)이라 독자에 따라서는 조금 위화감을 느낄 사람도 있을 것 같네요. 루팡3세에서 고에몽이 쓰던 참철검이라던가 파이널 판타지에서 오딘이 쓰던 참철검이라던가....  
 

 

by 산산散散 | 2009/10/25 16:39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2)

『살룡사건』, 퓨전요리같은 작품을 원하는 당신에게

 

 

카도노 코헤이 저/카네코 카즈마 그림/문정훈 역 | 학산문화사(단행본) | 원서 : 殺龍事件

  

용이 살고 있는 도시, 로미아잘스. 그곳에서 일어난 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캇타타 국의 레제 리스캇세 대위와 칠해연합의 히스로우 크리스토프 소령, 그리고 전지조정사(戰地調停士) ED가 로미아잘스에 파견된다.

 
러나 도착한 시가지는 예상 외로 고요하고 전쟁 중이라는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용의 수호를 받고 있다는 이 도시만의 특수성 때문일까 하고 의아해하는 리스캇세 대위와 히스로우 소령에게 ED는 용을 만나러 가 보자며 제안한다. 그렇게 용이 있는 동굴에 도착한 그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의 현장이었다. 다름 아닌 불사신인 용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금속 막대기에 찔린 채.

일국의 군대로도 전혀 상대할 수 없는 존재인 용이, 결계로 인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동굴, 즉 밀실에서 살해된 사실에 아연실색한 리스캇세, 히스로우, 그리고 ED. 마침 그때 로미아잘스의 수령이 나타나고 용의 죽음을 확인한 수령은 셋을 범인으로 의심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그때, 전지조정사 ED가 범인을 잡아 오겠다며 모두의 앞에서 호언한다. 수령은 한 달이라는 시간 안에 범인을 찾아오지 못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저주를 ED에게 걸고, ED는 리스캇세 대위, 히스로우 소령과 함께 용의 죽음에 관련된 용의자 6명을 만나러 혼돈의 세계로 떠나는데…….

 

 

 

0. 들어가며
 
살룡사건은 카도노 코헤이의 전지조정사 시리즈 제 1탄입니다. 일단은 미스터리와 판타지의 퓨전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긴 한데, 읽어본 입장에서는 조금 미묘하네요. 저는 이 작가의 애매모호하고 두리뭉실하며 뭔가 잡힐 것 같지만 실제로 잡히는 건 없는 작풍을 좋아하기 때문에 광고문구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정답이었군요.
 
 
 
1. 성격
 
판타지와 추리만큼 궁합이 맞지 않는 조합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추리소설은 독자와 작가가 공유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논리를 벽돌삼아 쌓아가는 탑이고, 판타지소설은 독자가 원하는 환상을 작가가 창조해서 선보이는 테마파크 같은 거니까요. 판타지소설이 보여주는 '세계'와 독자 사이에는 매우 높은 이해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추리'라는 능동적 행위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도노 코헤이가 선택한 방법은 '여행'입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이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독자에게도 속삭이는 겁니다. 이곳은 이런 세계다, 하고. 
 
판타지인 이상 현실을 기반으로 할 때처럼 모든 부분에서 틀을 공유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추리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제공하며,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유도해서 사고의 범위를 한정시킵니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 이런 식으로. 이를 통해 미지의 세계 속에서 헤맬 독자를 진상에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거죠.
 
 
 
2. 이해
 
'이것'은 말하자면 용의 정신세계입니다. 우리가 전지조정사 세계관의 용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처럼, 주인공 일행들 역시 용이 어떤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걸 모르면 진상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 이렇게 해서 그들과 우리들의 공통점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이 용가리의 머리 속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그들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는 공통점이. 그러니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겠죠? 그것이 바로 용과 만났던 이들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겁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용과 만나서 서로 다른 경험을 했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탐정역의 ED는 차츰 용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상에 도달하게 되죠. 드러난 진실에 독자들도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ED일행의 여정에 녹아들어 이 세계를 느꼈다면, 적어도 납득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럴 만 하다고.
 
 
 
3. 인물
 
미스터리 측면에서는 그렇다 치고, 그 외의 부분도 살펴볼까요. 우선 캐릭터부터. 주인공 일행은 모두 세명입니다. 전지조정사이자 탐정 역을 맡고 있는 ED,  강대한 무력과 드높은 정의감의 소유자 히스로우, 둘에 비하면 희미하지만 나름 재주는 있는 히로인(?) 레제. 방문자 6인을 순례하는 여행 도중 레제는 해적섬에서, 히스로우는 모 왕국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매력을 발산하긴 합니다만 이야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ED입니다.
 
문제는 ED라는 녀석이 비밀이 많다는 거죠. 안그래도 미지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추리라는 건 독자가 따라가기 벅찹니다. 탐정이 세상에 다시없을 정직한 이라 해도 그렇죠. 그런데 ED는 자기 나름의 꿍꿍이가 있고, 진상을 밝혀내는 것보다 자기 목적이 우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의 과정에 독자는 알 수 없는 'ED의 목적'이라는 변수가 섞이며 미묘한 비틀림이 생깁니다.
 
마지막에 밝혀주긴 합니다만 그 전까지는 ED의 행동원리를 짐작하기가 힘들어지는 문제가 생기죠. 이 부분이 좀 아쉬웠습니다. 생소한 세계에서 진상을 찾아 헤매는 여행에 유일한 가이드는 탐정이거늘, 그 탐정이란 놈이 자기 속내를 꼭꼭 감춰두고 있으니 독자는 누굴 믿으라는 건지.
 
 
 
4. 기타
 
세계관 설정은 참 깔끔하다고 봅니다. 시리즈화를 염두에 두고 쓴 듯 후속작에 등장시킬 배경을 미리미리 잘 배치하고 있고, 독특한 마법관과 다양한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계면간섭학은 적절한 양념이 되어줍니다. 국가를 초월한 상인들의 집단 칠해연합의 대변자인 23인의 전지조정사가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어떻게 주인공 일행과 엮여나갈 것인지 흥미진진합니다.
 
일러스트는 일본의 대표적인 악마화가로 대단히 유명한 '카네코 카즈마'가 맡았습니다. 이 사람 일러 분위기를 아는 이라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대충 감을 잡으시겠죠. 약간 기계적인 느낌의, 마치 대리석으로 깎아놓은 듯한 인물들과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이형(여기서는 용)이 멋집니다. 하지만 각 챕터 시작할 때 나오는 손바닥 반의 반도 안되는 조그마한 그림쪼가리를 제외하면 전혀 삽화가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컬러 일러스트 6page만으로는 명확한 이미지를 움켜쥐기에 좀 부족한 듯 싶네요. 비싼 일러스트레이터라 그런가 봅니다.
 
 
번역은, 아무래도 100점 드리진 못하겠네요. 뒷표지의 '그것도 폐쇄된 공간에서 창에게 찔린 채...' 같은 번역은 명백한 비문이죠. 창은 주체도 아니고 인격체도 아니니 '창에게'가 아니라 '창에'로 써야 합니다.
 
"스케노케츠 경을 왜 만나려는 거요, 크리스토프 님?" (105쪽)
"그건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소, 야마기 님?" (107쪽)
 
이런 경우 원문에는 분명히 도노(どの, 殿)가 쓰였을 거라 짐작합니다. 이 단어는 어느 정도 사무적인 느낌이라 위와 같은 흐름이라면 '공(公)'으로 번역해서 '크리스토프 공', '야마기 공' 정도로 쓰는 게 자연스러울 듯 합니다. 실제로 도노는 공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말은 평대로 하고 호칭엔 님을 붙이는 건 문제가 있지요. 이외에도 몇가지가 걸리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난하므로 93점.
 
 
 
5. 맺음말
 
전지조정사 시리즈는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융합시키려 시도한 소설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추리 요소를 가미한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 배경의 추리 소설에 더 가깝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스터리 측면의 완성도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카도노 코헤이는 멋진 세계를 만들어놓고 독자들을 추리극에 초대했습니다. 그로써는 최대한의 성의를 담아 자신이 만든 세계를 자랑하고 그 구성원리를 알려주어 함께 추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눈으로 보자면 대성공이라 평가하긴 힘들듯 합니다.
 
첫째,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용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고 드러난 부분조차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어 작가가 제시하는 답안에 완전히 공감하기 힘듭니다 . 둘째, ED 개인의 목적으로 인해 독자가 그를 따라가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셋째, 초월적인 존재의 살해를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그 수단도, 동기도, 과정도 아스트랄하여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 식입니다.
 
이렇게 혹독하게 이야기는 해도 읽으면서 저는 즐거웠습니다. 추리의 정합성에는 문제가 많지만, 착안점의 기발함에는 감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달리 '추리'라는 단어에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기대치를 낮출 것을 권합니다. 
 
저는 추리보다는 카도노 코헤이라는 작가가 만든 판타지 세계관에 흥미가 있어서 살룡사건을 구매했고, 기대치가 낮았던 건지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살룡사건에서 살짝살짝 드러난 이야기의 싹이 후속 사건에서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보기 위해서라도 계속 구매할 것 같네요. 
 

 

 

 

by 산산散散 | 2009/10/25 16:34 | 라이트노벨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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