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 개 :::
엑셀월드의 작가 카와하라 레키는 본래 일본의 소설 연재 사이트인 Arcadia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다. 그곳에 연재하던 '초절가속 버스트링커'라는 글로 제15회 전격소설상에 응모, 대상을수상함으로써 정식출판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카와하라 레키는 엑셀 월드 외에도 소드 아트 온라인이라는 또 다른 작품을 내기로결정되었는데, 이런 신인 작가가 거의 동시에 두 작품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품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엑셀월드는 소심한 뚱보소년 하루유키가 어느날 흑설공주라 불리는 소녀를 만나서 변모하게 된다는,전형적인 <Boy meets girl> 류의 작품이다. 많은 라이트노벨이 일상을 대표하는 평범한 남자 주인공과비일상에서 뛰쳐나온 특이한 히로인의 구도를 가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도 별다를 것 없어보인다.
그런데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뭔가가 특별하다. 뭘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답이 나왔다. 낙차가 크다. 스프링을 힘주어 누르면 누를수록 더 강하게 튕겨나오듯이. 가볍게 치는 잽보다 힘껏 당겼다 날리는 스트레이트가 아프듯이. 평범한 소년이 비범한 소녀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미치도록 찌질한 뚱땡이가 미치도록 매력적인 소녀를 만나는 것이다. 변화의 폭이, 변화의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루유키는 키가 작고 뚱뚱한 왕따 소년이다. 학교에서는 집단 이지메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런 주제에 자존심만 살아서 동정은 싫어하고 도움의 손길은 걷어차는,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밑바닥 찌질이 인생 되겠다.
개인적으로 찌질이 캐릭터는 정말 싫어한다. 별것도 아닌 걸 혼자 과민하게 받아들여서는 폭주하며 밑도 끝도 없이 바닥을 들이파는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다. 하루유키도 그렇게 느껴졌기에 처음엔 약간 불안했다. 근데 읽다보니 놀라울정도로 감정이입이 잘 되는 게 아닌가.
사실 외모가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열등한 외모를 갖고 있다면 스스로도 위축되고, 주변에서는 내려다보고 업신여긴다.도피하려 해도 학생이라는 신분이 족쇄가 되어 학교를 벗어날 수도 없다. 지옥인 걸 아는데 매일매일 제발로 기어들어가야 하고,하루하루 상처가 누적되다보면 찌질이가 안되기도 힘들다.
이렇듯 독자가 수용하고, 동화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는 점이 하루유키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 그럴 만 하지... 끄덕끄덕... 이런 거다. 다만 이해한다고 해서 찌질대는 것이 답답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다. 읽는 동안에 뭔가 자꾸 울컥거리는 기분이 들고, 등짝을 발로 뻥 차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독자만 그런가? 당사자인 하루유키는 그 수천, 수만 배의 '울컥'을 가슴 속에 쌓아두고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쌓이고 쌓여서 강렬한 도피 욕구로 나타난다.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되고 싶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가고 싶은,그런 마음. 이 당시의 하루유키에게는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대로 몇년이 흘렀다면 슬슬삐뚤어지다가 인간 쓰레기가 되는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나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바닥없는 어둠 속에 드디어 한줄기 빛이 나타난다. 작은 촛불도 아닌, 눈이 멀어버릴 듯 눈부신 존재가.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뒤에 다 쓰겠지만 엑셀월드에는 많은 장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엑셀월드를 읽은지 열흘이 지난 지금, 나의 기억 속에는 흑설공주만이 빛나고 있다. 이토록 매력적인 히로인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흑설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미소녀이고, 부학생회장이다. 또한 전설적인 전사이자 위대한 통솔자이며, 희생을 두려워않는 이상의추구자임과 동시에 상처를 핥으며 기회를 노리는 도전자이기도 하다. 하루유키와의 만남 이후로는 또다른 얼굴도 갖게 된다.
이런 다양한 면모 속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별명처럼 참으로 공주답다는것이다. 공주병 할 때 그 공주가 아니라 기품있고 고결함을 뜻한다. 언행은 단정하고, 언제 어디서나 사려깊고, 자신의 책임에등돌리지 않는다. 심지어 이 소녀는 사랑조차도 멋드러지게 한다. 평생 처음 느낀 감정에 당황하면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는,당당하고 긍지높은 공주님.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소녀와 지지리궁상 하루유키가 만났다. 절실한 현실도피 욕구에 충만해 있던 그에게 흑설공주는 탈출구를제안하고, 마침내 그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하루유키의 갈증은 너무나 깊은 것이었고 흑설공주의 인도는 한없이 달콤한 것이었으니,이는 불난 집에 LPG통 던진 격이고 이무기에게 여의주를 준 격이다.
기술적으로 매우 발달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해서 대다수 사람들은 넷에 링크한 채 가상현실과 현실을 오가며 생활한다. 하드한 SF소설 수준의 깊은 고찰이 담긴 미래세계는 아니며(라노베잖음...), 그저 현대 일본의 생활상에 IT만 고도로 발달한 세계를 그려낸 수준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만큼의 설정은 착실히 해두고 있어서 엉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엑셀월드의 세계에도 가상현실 게임은 있지만 이 작품에서 주무대가 되는 <가속세계加速世界>는 그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공간이며, 선택받은 자만이 접속할 수 있는 극도로 가속된 시간 속의 전장이다. 즉 엑셀월드는 현실/가상현실/가속세계의 3중 구조라고 이해하면 된다.
적재적소에 '이유'를 제시해서 내적 개연성을확보해주는 것은 이 작품의 큰 장점인데, 여기서도 그런 면이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가속세계에 접속할 수 있도록 선택받은자, 버스트링커들이 어째서 끝없는 싸움을 계속하는가, 혹은 이 놀라운 세계가 어떻게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등등. 사소한 것 같지만 필연적으로 도출될 이런 의문에 대해, 작가는 하나하나 성의껏 답해준다.
또흑설공주와 하루유키에게는 그것과는 별개로 추구해야 할 이상을 제시하여 그들의 가시밭일 게 뻔한 앞길을 헤쳐나갈 원동력으로삼는다. 나처럼 까다로운 축에 속하는 독자는 인과관계나 동기에 대한 집착이 꽤 강하다. 계산적이고 냉정하게 작품을 바라보는 일이많기에 적절한 설명이 없다면 반발하는 일이 잦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카와하라 레키는 원인과 결과를 주무르는 솜씨가 무척 뛰어나고, 적어도 나라는 독자는 만족시켰다.
자신이 뚱뚱이 땅딸보로 십수년을 살아온 찌질이인데 절세미소녀가 자꾸만 은근한 호의를 드러낸다고 가정을 해보자. 대부분의 라이트노벨이라면 당황하면서도 좋아할 것이고, 어어 하는 사이에 휘말려 들어가서는 서로 러브러브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면 얘가 왜이러지, 뭐 잘못 먹었나, 별 생각없는 행동인데 내가 착각한 거겠지, 무슨 꿍꿍이지, 나를 놀리는 건가, 대충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엑셀월드는 후자 쪽에 가깝다. 매우 현실적인 묘사다.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맘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라 이런 반응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반면에 그런 현실 따위 한방에 때려부술 정도로 임팩트 있는 사건으로 사람을 바꿔놓기도 한다. 세상 어떤 찌질이라도 바뀌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리얼하면서도 라노베틱한 묘사에 대만족♡
러브라인은 어떨까. 흑설공주가 워낙 강력해서 조금 가려지긴 하지만, 소꿉친구 캐릭터인 치유리도대단히 매력적인 소녀다. 일단은 서브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치유리와 하루유키의 관계는 실로 미묘한 점이 있어서 하렘이라고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하렘물에서 남성독자가 바라는 것을 1/3 정도는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도. 네타가 되므로 더 이상의언급은 피하겠다. 어쨌든 소꿉친구 모에라면 최고의 캐릭터일듯.
가속세계에서의 전투는 그쪽 전용의 아바타로 변신해서 행하게 되므로 특촬액션의 느낌이 살짝 난다. 전투를 통해 랭크를 올리면서능력이 상승하는 형식이라 게임 판타지의 풍미도 있고, 아바타의 속성에 따라 근접/원거리/특수/혼합 등이 나뉘는 점에서는이능배틀물의 요소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약간의 전략성이 가미된 열혈전투가 주가 되며(하루유키는 저랭크 허접이니 다른 방법도 없지만), 1권 말미를 장식하는 전투씬은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여러가지 의미로.
해설집, 후기, 광고를 다 뺀 300여 페이지 분량에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각 장면 연결이 무척 부드러워서 술술넘어간다. 비록 작품 내에서 제시되는 수수께끼가 경력있는 라이트노벨 독자라면 손쉽게 풀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착실하게 반전을준비하고 떡밥을 던지는 모습은 인정할 만 하다.
우리들 라노베 독자는 강자다. 왠만한 작가의 의도쯤은 대번에 간파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덤비는 것이 훨씬 보기 좋다. 라노베에서 이정도면 충분한 듯 하다. 어쨌든 치밀하게 계산해서 꽉 짜놓았다는 느낌이며, 에필로그의여운있는 처리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일러스트는 [표지 A+ / 컬러삽화 A+ / 흑백삽화 A]정도, 최고 수준이라 본다. 특히 흑백 일러스트도 대단한 퀄리티라는 점, 정말 필요한 부분에 삽화가 쏙쏙 들어있다는 점, 에로도빼먹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만 그림체가 너무 부드러운 편이라 흑설공주의 캐릭터를 100% 드러내지는못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엑셀월드에서 혁명적이라 할 만한 무언가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소재의 선택과 활용, 세계관 및 세부설정, 감정묘사,갈등구조, 액션과 열혈, 대리만족, 모에와 감동 등등 모든 분야에 두루 뛰어난 작품이다. 특별히 쳐지는 부분 없이 절묘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어서 비판할 점을 찾기가 힘들다. 읽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했고, 다 읽은 후에는 커다란 만족감과 그보다 더 큰 갈증(2권 내놔!!!!)을 느꼈다. 이런 작품이라면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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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감사합니다. :D
저야 소소하게 글 남길 뿐이고 가끔 몇분이나마 들러서 흔적 남겨주시면 감사할 뿐인지라...
느긋하게 산책하듯 꾸려보겠습니다. ^^
애리모에는 이 글 올렸다가 포르테님께서 메인에 띄워주셔서...
그때 보신 것 같네요. ^-^
어휘가 좀 어려워서 해석하는게 그랬지만은..
그리고 6월달에 2권이 나온다고 합니다.
소드아트 온라인 리뉴얼 하는 것만도 힘들었을 텐데
작가가 꽤 열정적인 스타일인가 봅니다. 기쁜 일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