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살룡사건은 카도노 코헤이의 전지조정사 시리즈 제 1탄입니다. 일단은 미스터리와 판타지의 퓨전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긴 한데, 읽어본 입장에서는 조금 미묘하네요. 저는 이 작가의 애매모호하고 두리뭉실하며 뭔가 잡힐 것 같지만 실제로 잡히는 건 없는 작풍을 좋아하기 때문에 광고문구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정답이었군요.
1. 성격
판타지와 추리만큼 궁합이 맞지 않는 조합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추리소설은 독자와 작가가 공유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논리를 벽돌삼아 쌓아가는 탑이고, 판타지소설은 독자가 원하는 환상을 작가가 창조해서 선보이는 테마파크 같은 거니까요. 판타지소설이 보여주는 '세계'와 독자 사이에는 매우 높은 이해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추리'라는 능동적 행위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도노 코헤이가 선택한 방법은 '여행'입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이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독자에게도 속삭이는 겁니다. 이곳은 이런 세계다, 하고.
판타지인 이상 현실을 기반으로 할 때처럼 모든 부분에서 틀을 공유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추리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제공하며,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유도해서 사고의 범위를 한정시킵니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 이런 식으로. 이를 통해 미지의 세계 속에서 헤맬 독자를 진상에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거죠.
2. 이해
'이것'은 말하자면 용의 정신세계입니다. 우리가 전지조정사 세계관의 용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처럼, 주인공 일행들 역시 용이 어떤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걸 모르면 진상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 이렇게 해서 그들과 우리들의 공통점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이 용가리의 머리 속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그들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는 공통점이. 그러니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겠죠? 그것이 바로 용과 만났던 이들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겁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용과 만나서 서로 다른 경험을 했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탐정역의 ED는 차츰 용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상에 도달하게 되죠. 드러난 진실에 독자들도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ED일행의 여정에 녹아들어 이 세계를 느꼈다면, 적어도 납득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럴 만 하다고.
3. 인물
미스터리 측면에서는 그렇다 치고, 그 외의 부분도 살펴볼까요. 우선 캐릭터부터. 주인공 일행은 모두 세명입니다. 전지조정사이자 탐정 역을 맡고 있는 ED, 강대한 무력과 드높은 정의감의 소유자 히스로우, 둘에 비하면 희미하지만 나름 재주는 있는 히로인(?) 레제. 방문자 6인을 순례하는 여행 도중 레제는 해적섬에서, 히스로우는 모 왕국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매력을 발산하긴 합니다만 이야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ED입니다.
문제는 ED라는 녀석이 비밀이 많다는 거죠. 안그래도 미지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추리라는 건 독자가 따라가기 벅찹니다. 탐정이 세상에 다시없을 정직한 이라 해도 그렇죠. 그런데 ED는 자기 나름의 꿍꿍이가 있고, 진상을 밝혀내는 것보다 자기 목적이 우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의 과정에 독자는 알 수 없는 'ED의 목적'이라는 변수가 섞이며 미묘한 비틀림이 생깁니다.
마지막에 밝혀주긴 합니다만 그 전까지는 ED의 행동원리를 짐작하기가 힘들어지는 문제가 생기죠. 이 부분이 좀 아쉬웠습니다. 생소한 세계에서 진상을 찾아 헤매는 여행에 유일한 가이드는 탐정이거늘, 그 탐정이란 놈이 자기 속내를 꼭꼭 감춰두고 있으니 독자는 누굴 믿으라는 건지.
4. 기타
세계관 설정은 참 깔끔하다고 봅니다. 시리즈화를 염두에 두고 쓴 듯 후속작에 등장시킬 배경을 미리미리 잘 배치하고 있고, 독특한 마법관과 다양한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계면간섭학은 적절한 양념이 되어줍니다. 국가를 초월한 상인들의 집단 칠해연합의 대변자인 23인의 전지조정사가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어떻게 주인공 일행과 엮여나갈 것인지 흥미진진합니다.
일러스트는 일본의 대표적인 악마화가로 대단히 유명한 '카네코 카즈마'가 맡았습니다. 이 사람 일러 분위기를 아는 이라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대충 감을 잡으시겠죠. 약간 기계적인 느낌의, 마치 대리석으로 깎아놓은 듯한 인물들과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이형(여기서는 용)이 멋집니다. 하지만 각 챕터 시작할 때 나오는 손바닥 반의 반도 안되는 조그마한 그림쪼가리를 제외하면 전혀 삽화가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컬러 일러스트 6page만으로는 명확한 이미지를 움켜쥐기에 좀 부족한 듯 싶네요. 비싼 일러스트레이터라 그런가 봅니다.
번역은, 아무래도 100점 드리진 못하겠네요. 뒷표지의 '그것도 폐쇄된 공간에서 창에게 찔린 채...' 같은 번역은 명백한 비문이죠. 창은 주체도 아니고 인격체도 아니니 '창에게'가 아니라 '창에'로 써야 합니다.
"스케노케츠 경을 왜 만나려는 거요, 크리스토프 님?" (105쪽)
"그건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소, 야마기 님?" (107쪽)
이런 경우 원문에는 분명히 도노(どの, 殿)가 쓰였을 거라 짐작합니다. 이 단어는 어느 정도 사무적인 느낌이라 위와 같은 흐름이라면 '공(公)'으로 번역해서 '크리스토프 공', '야마기 공' 정도로 쓰는 게 자연스러울 듯 합니다. 실제로 도노는 공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말은 평대로 하고 호칭엔 님을 붙이는 건 문제가 있지요. 이외에도 몇가지가 걸리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난하므로 93점.
5. 맺음말
전지조정사 시리즈는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융합시키려 시도한 소설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추리 요소를 가미한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 배경의 추리 소설에 더 가깝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스터리 측면의 완성도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카도노 코헤이는 멋진 세계를 만들어놓고 독자들을 추리극에 초대했습니다. 그로써는 최대한의 성의를 담아 자신이 만든 세계를 자랑하고 그 구성원리를 알려주어 함께 추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눈으로 보자면 대성공이라 평가하긴 힘들듯 합니다.
첫째,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용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고 드러난 부분조차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어 작가가 제시하는 답안에 완전히 공감하기 힘듭니다 . 둘째, ED 개인의 목적으로 인해 독자가 그를 따라가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셋째, 초월적인 존재의 살해를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그 수단도, 동기도, 과정도 아스트랄하여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 식입니다.
이렇게 혹독하게 이야기는 해도 읽으면서 저는 즐거웠습니다. 추리의 정합성에는 문제가 많지만, 착안점의 기발함에는 감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달리 '추리'라는 단어에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기대치를 낮출 것을 권합니다.
저는 추리보다는 카도노 코헤이라는 작가가 만든 판타지 세계관에 흥미가 있어서 살룡사건을 구매했고, 기대치가 낮았던 건지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살룡사건에서 살짝살짝 드러난 이야기의 싹이 후속 사건에서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보기 위해서라도 계속 구매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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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생각나면 한번씩 들르는 곳이랍니다.
좀 다르게 꾸며볼까 싶은데 아직은 맘이 정해지지 않아서...
[후다다닥]